2005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마더」 황정은 (2024)

[2005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마더

황정은

제 사간 고기는 맛이 이상했어. 남자는 진열대 가장자리에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걸치고 말한다. 병든 소였지? 몇 달 동안이나 항생제를 먹다가 죽어버린 소 말이야. 뉴스에서 봤어.

오는 진열대에 바짝 붙어 선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오의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 선생과 닮았다. 오는 그 선생에게 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수업 중에 볼펜을 시끄럽게 딸각거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독일어 선생은 오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서 여섯 차례 뺨을 때렸다. 특이한 모양으로 손바닥을 구부려서 딱, 딱,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그는 흡족한 듯 웃고 있었다. 얇은 입술이 길쭉하게 벌어지고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오는 뺨 안쪽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빨아먹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저 남자를 우연히 만나면 입을 찢어버리자고 마음을 먹었다. 남자의 광대뼈는 그 독일어 선생의 것보다 튀어나와 보인다. 정수리쯤의 두상도 훨씬 좁고 높은 것 같다. 하지만 고교를 졸업한 지도 팔 년이나 흘렀으니까, 세월 탓에 저런 얼굴로 변했을지 모른다. 그 고등학교에 재직한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면 이빨 틈에 나이프를 밀어 넣고, 볼 쪽으로 단숨에 날을 당겨, 입을 찢는다. 지금? 지금. 오는 팔을 늘어뜨린 채 손바닥을 말았다 펴며 남자의 얼굴을 본다. 뭘 드릴까요. 현대정육도매센터의 또 다른 직원인 윤이 남자를 향해 말한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진열대 유리를 꾹 누르며 돼지갈비를 두 근 달라고 말한다. 암퇘지와 수퇘지 중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오는 묻는다. 남자는 투명한 다갈색 눈으로 오를 바라본다. 남자가 말한다. 무슨 차이가 있나. 암퇘지는 갈비뼈가 둥글고 수퇘지는 평평하다고 오는 대답한다. 아시다시피, 오는 끈적거리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는다. 암퇘지는 뱃속에서 새끼를 키워야 하니까요.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암퇘지를 달라고 말한다. 오는 고깃덩어리를 육절기 속에 밀어 넣고 버튼을 누른다. 둥근 칼날이 부드럽게 회전을 시작하고 같은 간격으로 말끔히 잘린 갈빗살이 밀려나온다. 오는 한쪽 손바닥에 고기조각을 차곡차곡 포개며 숙성실 쪽을 돌아본다. 현대정육도매센터의 사장이 숙성실 불빛 속에서 오늘 들어온 소를 부위별로 나누고 있다. 손잡이에 노란색 고무 밴드를 감은 스위스 나이프를 손에 쥐고 꼭 필요한 만큼만 팔꿈치와 손목을 움직여 우둔과 설도와 사태를 떼어내고 채골과 안심을 나눈다. 오는 인중에 배어 나온 땀을 빨아먹는다. 이대로 도마를 밟고 진열대를 넘어 남자에게 달려든다면 사장이 저 나이프를 쥔 채 달려 나올 것이다. 오는 다음에, 라고 생각한다. 돼지갈비가 든 비닐봉지를 진열대 너머로 건네며 다음에, 라고 말한다. 남자는 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간다. 현대정육도매센터의 유리문이 와르르 흔들린다. 정육점 천장에 매달린 십육 인치 텔레비전의 화면에도 가느다란 노이즈가 떠오른다. 무선 마이크를 쥔 남자 사회자와 여자 사회자의 얼굴이 지그재그로 비틀린다. 오는 진열대에 가슴을 누르고 선 채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오는 저 프로그램의 오프닝 송을 기억한다. 사춘기 때 저 프로그램의 주소로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 나를 낳은 여자는 코끼리와 오리가 그려진 종이가방에 나를 담아 전철에 버렸습니다. 그 여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쳐가며 정중하게 써서 보냈는데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가 답해주지 못할 문제를 안고 있다, 오는 노래 부르듯 중얼거린다. 짤깍짤깍 소리를 내며 시계바늘이 움직인다. 해체도 위로 늘어진 십자수 시계 속에서 얼굴이 흰 소년과 소녀는 매일 키스하고 키스한다. 검은 벌레 한 마리가 둔한 움직임으로 벽을 가로질러 돼지 해체도 밑으로 숨어든다. 만지는 사람이 없는데도 해체도 표면은 늘 불투명한 기름 막으로 덮여 끈적거린다. 고깃점에서 흘러나온 묽은 피가 모노륨 바닥에 고여 있다. 현대정육도매센터의 사장이 근육과 지방이 달라붙은 스위스 나이프를 행주에 닦으며 숙성실에서 나온다. 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장은 볶음밥을 먹고 또 다른 직원인 윤은 울면을 먹는다. 오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게 밖에 내어놓고 그 위에 앉아서 자장면을 먹는다. 사장과 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오에게 안으로 들어와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는 플라스틱 그릇 속의 면을 휘젓는다. 날이 흐리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갑고 매캐한 공기가 빨려 들어와 목을 자극한다. 플라스틱 그릇 속의 면은 금세 식는다. 오는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촛농 같은 기름덩어리를 젓가락 끝으로 밀어내며 면을 건져먹는다. 툭, 툭, 툭, 하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울린다. 오는 자신의 심장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밤에 들은 마더의 심장소리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트럭 한 대가 길 건너편의 비탈길을 내려와 도로 쪽으로 느릿느릿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은색 범퍼가 둔탁하게 반짝인다. 보도 위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트럭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오는 저기 어디쯤에서 마더를 주웠다. 밤이었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보도에 주차된 흰색 세피아와 감색 엘란트라 사이에서 마더는 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오른쪽 눈에 연필심만한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해파리처럼 생긴 신경조직들이 밀려나와 있었다. 많은 액수의 수술비와 두 달간의 진료비가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오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돈이 들어갈 만한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니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지만 돈은 늘 남는다. 오는 길에서 주운 개에게 마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더는 요즘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쪽만 남은 눈으로 물끄러미 사람을 바라본다. 마더의 눈을 치료한 의사는 마더의 나이가 꽤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오는 면을 다 골라먹은 자장그릇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다. 오렌지색 하프코트를 입은 여자가 구두 굽으로 딱딱 보도를 찍으며 오의 앞을 지나간다. 나를 낳은 여자도 저런 구두를 한 켤레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는 여자의 구두를 바라본다.

길쭉한 새의 그림자가 오의 운동화 위로 휙 지나간다. 오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새는 없고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오의 이마에서 탁 터진다.

인사를 하는 일도 안부를 묻는 일도 없다. 나이도 묻지 않고 이름은 더구나 묻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에 대한 리포트를 제출 받아 회원을 선발한다. 그러나 평가가 까다로워 근래에 새롭게 들어온 회원은 없다. 오를 포함한 네 명의 회원은 모두 ‘티파니’로 불린다. 일주일에 한번, 온라인에서 만나 투표를 한다. 당신은 살고 싶은가. 답은 예스, 노우로 선택된다. 한 사람이라도 ‘예스’를 선택한 순간에 접속은 끊어진다. 오프라인 모임은 단 한번. 언젠가 죽음이 결정되는 날에 열릴 것이다. 드릴로 머리를 뚫어 죽은 사람도 있다고 티파니가 말한다. 가장 추한 자살은 창자를 쏟아놓고 죽는 것이라고 티파니가 말한다. 그 냄새를 생각해 봐! 자살은 필연이자 권리라고 티파니가 말한다. 사람이 생각을 할 줄 아는 생물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다. 단지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생각은 왜 필요한가. 사람은 분명 살아가지만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생각하고 평가하며 최종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생각’이 그러한 권리의 명백한 증거다.

오는 모니터에 떠오르는 티파니의 말을 들여다본다. 마침표 부분에 번진 지문자국을 손가락으로 닦아낸다. 마더가 다가와 오의 발가락에 축축한 코를 댄다. 오는 가볍게 몸을 떤다. 마더는 오의 발등을 베고 눕는다. 그리고 이따금씩 기침을 한다. 이웃집과 맞붙은 벽 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자기타와 드럼의 뭉툭한 소음에 짓눌린 채 들려온다. 티파니는 다양한 자살법과 자살을 해야 하는 개인적 이력에 대해 말하지만, 왜 함께 죽을 사람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비참한 모습으로 혼자 죽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거라고 오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처럼. 혼자는 불안하고 억울하다. 비겁한 일이 흔히 그렇듯이, 공범이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러니까 자신처럼.

오는 티파니의 이름으로 말한다. 누군가의 죽고 싶다는 열망은 또 다른 누군가의 뇌에 다다른다. 이를테면 텔레파시다. 당신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열심히 하면 이 세상의 누군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

옆집의 음악소리가 가파르게 높아진다. 누군가 거친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옆집 문을 두드린다. 쿵쿵쿵. 마더가 머리를 들고 으르렁거린다. 무리다. 곧바로 기침이 터진다. 등이 둥글게 말리고 네 다리가 가슴 쪽에 바짝 붙는다. 오는 책상 밑으로 팔을 뻗어 단단하게 굳은 마더의 목을 문지른다. 개액개액,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더는 몸을 늘어뜨린다.

모니터 속 티파니의 방에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다. 투표가 시작된다. 노우, 노우가 떠오르고 망설이듯 간격을 두고 예스가 떠오른다. 접속이 끊긴다. 티파니들은 당분간 더 살아간다.

오는 책상 서랍을 당겨 양고기가 든 캔을 꺼낸다. 뚜껑을 잡아 뜯고, 먹기 좋도록 손가락으로 헤집어서 바닥에 내린다. 코앞에 먹이가 놓였는데도 마더는 까만 눈으로 오를 바라볼 뿐 머리를 들지도 않는다. 오는 볼 안쪽 살을 어금니로 씹으며 마더를 바라본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엄지손가락이 부었다. 왜 부었지,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간다. 변기에 앉아 시간을 들여 조금씩 배변한다.

얼마 전까지 방안에 놓여 있던 행운목 화분이 변기 앞에 놓여 있다. 욕실 구석에 화분이 놓이게 된 경로를 생각해 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는 허리를 구부려 행운목을 들여다본다. 열 두 개의 잎은 모두 끝부분이 다갈색으로 말라 있다. 터질 듯 갈라진 줄기에는 진하고 독해 보이는 분비물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아직은 죽지 않겠다며 악을 쓰는 것 같다. 오는 행운목의 길쭉한 잎에 닿지 않도록 무릎을 바짝 당긴다. 변기 레버를 누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배설물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한 번 물을 내린다.

중학교 때 고흐의 화집을 본 적이 있다. 주말마다 고아원으로 자원봉사를 나오는 미대생이 있었다. 가슴이 납작하고 손가락이 길고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그 여자의 가방에서 지갑과 화집을 훔쳤다. 지갑 속엔 돈이 얼마 없었다. 강한 색상의 물감을 여러 번 덧발라 그린 그림들을 무심히 넘겨보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눈길이 멎었다. 나체로 몸을 웅크리고 앉은 여자의 옆모습을 데생한 그림이었다. 바로 이거다, 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마른 젖가슴과 공허하게 부푼 배, 울퉁불퉁한 등. 나를 낳은 여자는 꼭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흥분했다. 그림의 우측 하단을 살폈다. 길쭉한 뿔처럼 생긴 화가의 사인 옆에 r와 w만을 필기체로 쓴 sorrow 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왜 슬픔인가, 이 스케치의 이름은 마더가 되어야 한다. 커터로 제목을 긁어내고 제대로 된 제목을 붙여주었다. 지갑은 정화조 속에 버리고 화집은 개인사물함 밑바닥에 숨겼다. 지갑과 화집을 도둑맞은 미대생은 그 후로도 일년 반 동안 자원봉사를 계속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해 나오면서 화집을 잃어버렸지만 지금도 나를 낳은 여자, 를 중얼거리면 그 그림 속 여자가 떠오른다.

왼쪽 어깨를 떠밀려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오는 횡단보도 앞에 선 자신을 깨닫는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나머지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오는 눈으로 들이치는 빗방울을 방치하며 길 건너편을 바라본다. 신호등의 녹색 불빛이 점멸하고 있다. 오는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하고 한쪽 발에 실린 체중을 다른 쪽 발에 싣는다. 자신도 모르는 새 집중을 하고 있었던 탓에 신경이 피로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그림이 다시 망막으로 떠오른다. 여러 번 눈을 깜박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는 허벅지에 손가락을 대고 사라져, 라는 글자를 도독 찍는다. 짐을 잔뜩 실은 트럭 한 대가 반구형 화단에 물을 튀기며 지나간다. 눈이 녹은 빗물이 점퍼 안쪽으로 스며들어 어깨가 차다. 손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고 싶지만 손목에 힘이 없다. 설 대목이 다가와 바쁜 시즌이다. 하루 종일 차갑게 식은 고기와 힘줄과 뼈를 썰었다. 손목뼈를 감싼 피부 안쪽에서 미세한 거품이 부글거리며 끓는 것 같다. 집, 오는 중얼거린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마더에게 먹이를 주고 두꺼운 이불 밑에서 잠을 자자. 지금 이 순간이 웹 페이지에 떠오른 영상이라면 클릭 한 번으로 집(home)으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현실은 성가시고 불편하다.

도로 위로 차들이 이따금씩 지나간다. 여자와 남자가 횡단보도로 다가와 선다. 여자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쥔 채 남자는 씨이팔, 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웃고 여자는 웃지 않는다. 살이 긴 우산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좌우로 흔들린다. 시궁쥐 한 마리가 횡단보도의 첫 번째 라인까지 기어갔다가 되돌아온다. 두꺼운 천 조각으로 머리를 감싼 노파가 빌딩 그림자 속에 앉아 있다. 얼굴이 따가워. 오는 노파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는다. 노파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젖은 도로변에 걸터앉는다. 종이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죽죽 떼어내기 시작한다. 몸이 젖으면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런 날씨에 거리에서 병에 걸리면 죽는다. 저 노파의 균형 감각은 고장이 나버렸다, 생각하며 오는 노파를 바라본다. 노파의 가족은 어디에 있나. 노파의 마더는 어디에 있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가 되나. 오는 날이 밝는 대로 그것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비빈다. 뭘 알아본다고? 오는 중얼거린다. 이것과 그것, 그것과 저것을. 신호가 바뀐다. 오는 천천히 길을 건넌다.

오는 현관 문고리를 잡고 서서 빈집을 들여다본다. 거대한 생물의 숨소리가 잿빛으로 가라앉은 집을 흔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마더가 꼬리를 젓는다. 오는 그 허억허억 하는 소리가 냉장고 쪽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운동화를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의 전원 코드를 뽑는다. 냉장고에 어깨를 기대고 물을 먹어 몇 배나 무거워진 운동화를 벗는다. 양말도 바지단도 흠뻑 젖었다. 허리를 구부려 양말을 몇 번 잡아당기다가 포기한다. 젖은 양말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간다. 머리카락과 어깨에서 냄새가 난다. 씻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자야겠다는 욕구가 강해 그대로 침대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간신히 양말을 벗고 눈을 감는다.

톡, 톡, 톡, 톡. 마더의 조그만 발톱이 방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려온다. 침대 밑에서 그 소리가 뚝 그친다. 오는 허리를 옆으로 움직여 마더가 뛰어오를 자리를 만든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더는 움직이는 기척이 없다. 오는 침대 밖으로 팔을 내밀어 어두운 방바닥을 더듬는다. 마더의 따뜻한 머리에 손가락이 닿는다. 가슴 밑으로 손을 넣고 들어올린다. 마더는 조금 으르렁거리다가 잠잠해진다. 옆구리 근처에 내려놓자 바로 몸을 말고 눕는다. 오는 마더의 따뜻한 털 속에 손가락을 박는다.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오는 온몸의 마디를 나른하게 늘어뜨린다. 마더의 기침 소리가 들려와 두어 번 눈을 뜨려고 해 보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포기한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가듯 천천히 잠 속으로 떨어진다.

‘오’의 리포트

원장 어머니 사무실에는 낡고 큰 철제책상이 있었다. 책상 왼편으로 서랍이 세 개 있었다. 맨 윗서랍엔 자물쇠가 달려 있었지만 그 서랍이 잠겨 있는 날은 별로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볼 수 있는 서류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에이는 마곡동 유림마켓 앞 전봇대 밑에 버려졌다. 비는 개포동 현진상가 건물 삼층에 버려졌다. 씨는 영등포동 영보극장 132번 좌석 밑에 버려졌다. 디는 운이 좋게도, 꽃놀이가 한창인 놀이공원의 튤립꽃밭 한가운데 버려졌다. 나를 낳은 여자는 나를 종이가방에 담아 전철에 버렸다. 나의 서류파일 속에는 원장 어머니가 오려 모은 듯 당시의 신문기사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팔과 다리를 잔뜩 옴츠린 갓난아기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쪽 뺨과 가슴, 허벅지 피부에 신문의 활자체가 멍처럼 박혀 있었다. 팔과 다리가 너무 짤막했다. 부어오른 눈은 가느다란 선으로만 보였다. 성인(成人)으로 자라날 수 있는 생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갓난아기가 담겨 있었다는 종이가방도 사진 속에 있었다. 코끼리와 오리가 조악한 선으로 그려진 종이가방 겉면은 알 수 없는 액체가 묻었다 마른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나는 기사를 본래대로 반듯하게 접어 내 서류파일 속에 끼워 넣었다.

에이는 얼굴이 길고 피부색이 좋지 않았다. 에이는 열여섯 살 때 미쳤다. 처음에 에이는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해서 점점 넓은 폭으로 몸을 움직였다. 선생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고아원의 어머니들은 에이가 남달리 예민했기 때문에 미쳤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했다. 보람의 집 아이들은 모두 ‘보람의 집’이라는 로고가 찍힌 곤색 가방을 메고 등교했다. 에이는 언제나 그런 문제에 예민했다. 아래를 봐 주기 바란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수많은 바이트가 모인 섹터로 구성되고 그 섹터가 모여 동심원 모양의 트랙track이 된다. 이 트랙에 정보가 저장된다. LP레코드판이나 마라톤 트랙을 생각해 보라. 트랙의 어느 부분에 물리적인 손상이 발생하는 경우 그 구간을 배드 섹터bad sector라고 부른다. 배드 섹터가 생겨나면 하드디스크 내의 정보는 잘못된 트랙에서 공회전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엉켜서 결국 그 하드디스크는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우연히 이것을 발견한 후에 나는 끊임없이 이것에 관해 생각했다. 이것은 가장 은밀한 형태의 암호다. 나쁜 기억을 품은 사람은 언젠가는 자멸한다고 이 암호는 말하고 있다. 배드 섹터를 품은 하드디스크처럼 공회전을 거듭하다가 망가지고 마는 거다. 에이는 자신의 내부에 발생한 배드 섹터를 감당하지 못해 미쳐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경우를 생각해 보기 바래, 티파니. 나의 기록을 훔쳐본 그 날 이후로 나는 가끔, 종이봉지 속에 담겨 온몸으로 들었던 소리를 기억해 내곤 한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봐, 지금도 이렇게 쿵쿵쿵, 쿵쿵쿵, 하고. 살아가려면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머릿속에 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내게도 배드 섹터가 있는 셈이다.

나를 낳은 여자도 나 같은 배드 섹터를 품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가 낳은 아기를 종이가방에 담아 전철에 버리는 여자가 행복할 리 없잖아. 아기를 종이가방에 담아 전철에 버리는 행위와 버려지는 결과는 일종의, 물리적인 충격이다. 그녀는 나쁜 음식을 먹고 나쁜 공기를 마시고 나쁜 소리만을 듣는다. 끊임없이 튀어 오르는 LP판처럼 공전하는 거다. 그녀는 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아직 그녀의 신호를 받지 못했으니까. 자신을 낳은 여자의 신호라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녀의 그런 신호를 여태껏 기다려 왔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균형을 잃어 미쳐버려서 신호를 받아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면, 상황은 끔찍해진다. 나는 혼자 남고 싶지 않으니까. 티파니,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내가 그녀의 신호를 받을 수 있다면 그녀 역시 나의 신호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에이처럼 균형을 잃기 전에, 내가 먼저 신호를 발신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를 낳은 여자니까 그녀는 알아챌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오는 문득 눈을 뜬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혀가 저리다. 물을 마시고 싶어 침대를 빠져나간다. 방문턱을 밟고 서서 부엌 불을 켠다. 형광등 불빛이 시큰하게 눈을 찌른다. 오는 눈을 감는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빛의 반점들 틈에서 오는 마더를 본다. 마더가 다가온다. 목각인형처럼 걸음이 어색하다. 몇 발짝을 띄엄띄엄 내딛다가 냉장고 앞에서, 넘어진다. 마더의 몸이 터질 듯 팽팽하다. 오는 마더의 몸에 손을 얹는다. 미지근하다. 유리섬유처럼 털이 뻣뻣하다. 둥근 갈비뼈 밑에서 툭, 툭, 툭, 진동이 느껴진다. 콧구멍에서 분홍색 거품이 밀려나온다. 경련이 시작된다.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쉬려는 노력으로 마더의 턱이 벌어진다. 잇몸이 회백색으로 질리고 눈이 돌아간다. 네 개의 다리가 나무 막대처럼 꼿꼿해진다. 발톱 끝까지 굳은 상태가 몇 초간 이어진다. 두 번째 경련이 일어났을 때, 오는 마더의 동공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챈다. 뇌가 죽었다. 오의 입이 벌어지고 어, 소리가 새어나온다.

마더는 오랜 시간을 들여 죽는다. 경련과 고통스러운 호흡이 번갈아 이어진다.

경련이 일어날 때마다 오는 콩 튀듯 몸을 퉁긴다. 차라리 죽어 빨리 죽어, 라고 중얼거린다.

문득 마더가 숨을 들이쉰다. 다리와 등이 편안하게 풀어진다. 불그스름한 거품이 마더의 콧등과 이빨 틈으로 흘러내린다. 오는 마더의 머리에 손바닥을 올린다. 벌써 차갑다. 핏기가 남김없이 빠져나간 마더의 귀가 종이처럼 바스락, 소리를 낸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

오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눈꺼풀이 픽 소리를 내며 벌어진다. 컴퓨터 모니터가 뿜어내는 빛으로 벽과 천장이 푸르스름하다. 오는 방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누운 채 눈을 굴린다. 언제, 왜 이런 자세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다리부터 천천히 움직여서 일어난다. 손가락에서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검붉은 얼룩이 묻은 손가락을 빨며 오는 방을 나선다. 죽은 마더가 여태 냉장고 앞에 늘어져 있다. 오는 엄지손톱을 입속에 넣고 씹으며 마더를 내려다본다. 무엇이 빠져나갔는지 마더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납작하게 꺼져 있다. 오는 말라가는 피고름과 분비물 속에서 마더의 몸을 들어낸다. 깨끗한 타월에 마더를 올리고 피를 먹어 불그스름해진 털을 닦아낸다.

날이 완전히 밝은 뒤 오는 마더의 눈을 치료했던 의사에게 전화를 건다. 마더의 시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애완동물의 사체는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려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었다고 의사가 말한다. 괜찮다, 뜻 없이 중얼거리며 오는 2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벌린다. 조심스럽게 마더를 넣는다. 딱딱하게 굳은 앞발이 봉투를 뚫고 나올 것 같다. 오는 쪼그리고 앉아서 주먹으로 턱을 괸다. 다시 마더를 꺼낸다. 타월 몇 장으로 마더의 몸을 둘둘 말아 봉투 속에 넣는다. 봉투를 여며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입김이 하얗게 쏟아진다. 오는 종아리 근처에 늘어져 버적거리는 쓰레기봉투를 쥔 채 골목 입구 쪽을 바라본다. 중년여자가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있다. 음식쓰레기통은 목이 잘린 거대한 펭귄처럼 어정쩡한 모습으로 골목 끝에 서 있다. 여자는 음식 찌꺼기가 달라붙은 뚜껑을 젖히고 바구니를 기울여 내용물을 털어낸다. 탕, 하고 뚜껑을 닫는다. 오는 깜짝 놀란다. 무엇에 놀랐지, 생각하며 주위를 휙 돌아본다. 한쪽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고 맑은 콧물을 들이마신 다음 슬리퍼 속 발가락을 내려다본다.

마더가 보인다. 미처 타월로 감싸지 못한 발바닥 하나가 쓰레기봉투 안쪽을 팽팽히 밀고 있다.

오는 동물병원으로 간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사에게 마더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내민다. 오만원만 들이면 업자를 연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말한다. 오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의사는 마더의 심장이 문제라고 말한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심장이 폐를 짓눌러 터트렸다. 훌륭한 의료장비가 있었더라도 노환이기 때문에 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는 무릎 위에 마더를 올려놓은 채 병원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동물사체처리업자를 기다린다.

동물사체처리업자는 청치마에 연두색 재킷을 받쳐입은 차림으로 나타난다. 가죽구두 속에 파란 털양말을 신었다. 동물사체처리업자가 오를 바라보며 손톱 밑의 때를 긁어내는 동안 의사는 특별한 재질의 종이로 마더의 몸을 포장한다. 동물사체처리업자가 말한다. 애완동물은 언제든 죽게 되어 있어요. 오래 기억하면 자기만 손해죠. 의사가 연두색 종이로 포장한 꾸러미를 들고 나와 동물사체처리업자에게 건넨다. 붉은 색 종이꽃이 노끈으로 묶여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 만져보겠느냐고 의사가 묻는다. 오는 종이로 만들어진 꽃잎을 조금 만지다가 놓아준다. 동물사체처리업자는 한 손에 마더가 든 꾸러미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기타 폐기물이 든 쓰레기봉투를 질질 끌며 문턱을 나선다. 마더와 쓰레기봉투를 트렁크에 싣고 떠난다.

의사가 이제는 그만 가보라는 말을 한다. 오는 그렇게 한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앞에 고인 마더의 분비물과 체액을 닦아낸다. 정육점에 나가지 않았다.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현대정육도매센터의 사장은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또 다른 직원인 윤은 골절기나 육절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사장은 나이프를 휘두르며 오를 자르겠다고 소리 지르고 있을 것이다. 독일어 선생과 닮은 그 남자에게 자신의 고등학교에 재직한 일이 있느냐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포장김치를 뜯어 밥상에 놓는다. 밥을 먹으며 귀를 기울인다. 등 뒤로 팔을 뻗으면 마더의 동그랗고 따뜻한 머리에 손가락이 스칠 것 같다. 오는 리모콘을 끌어당겨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도 확인하지 않고 볼륨을 높인다. 대구의 타이어 공장에 불이 났다. 수십억 원의 재산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가 크게 상승했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는 올 해 설이 두렵다. 중국의 한 광산이 폭발해 160여명이 매몰됐다. 추가로 붕괴될 가능성이 있어 구출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내일은, 맑겠지만 바람이 불어 춥겠다.

오는 천천히 밥을 씹으며 몸을 기울인다. 묵직한 납덩어리가 목을 타고 등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등뼈가 무겁다. 숟가락을 쥔 채로 누워버린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여 밥을 씹는다.

그날 밤 티파니의 방이 열린다. 오늘 피아노를 구입했다고 티파니가 말한다. 피아노는 뭐에 쓰려고 어차피 죽을 거면서. 티파니가 빈정댄다. 어차피 죽을 거니깐. 티파니가 대답한다. 투표가 시작된다. 당신은 살고 싶은가……. 두 번째 답변이 올라오는 순간 접속은 끊어진다. 오는 피식 웃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예스라고 대답한다. 내심 나머지 회원들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자신 말고 누군가, 아직은 살고 싶다, 라고 말해주길. 그리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또다시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여유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면대의 곡면을 타고 흐른 물이 자꾸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더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고 생각했다가 오는 웃는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얼굴을 문지르고 조금 마신다. 녹맛이 나는 물이 탄산처럼 목을 자극하며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앞머리가 따끔하게 눈을 찌른다. 오는 욕실 수납장 앞으로 다가간다. 두 번째 수납 칸을 더듬어 가위를 찾아낸다. 마더를 씻기고 귀나 꼬리털을 정리해줄 때 사용하던 가위다. 둥근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날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에 사용하고서 물기를 닦아두지 않은 탓이다. 거울 앞에 서서 오는 앞머리를 자른다. 거울 속 충혈 된 두 눈이 오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눈썹뼈에 수평으로 날을 맞추고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잘라나간다. 거짓말 같다. 얇은 피부에 닿는 가윗날의 선뜩한 감촉이. 모두 거짓 같다. 티파니의 방, 마더의 기침소리, 에이의 초점 잃은 눈, 오래된 기사 속 잔뜩 찡그린 갓난아기의 얼굴. 마마, 라고 오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 어느 것이 거짓 같아 나를 잃었는가.

손가락에 가위를 끼운 채 오는 변기에 앉는다. 바싹 마른 행운목 잎이 오의 무릎을 스친다. 오는 숨을 죽인다. 행운목의 윤곽이 흐릿하게 사라진다. 꿈인가. 얼굴이 흰 소년과 소녀가 행운목이 있던 자리에 앉아 오를 바라본다. 둘 다 깨끗한 옷을 입었다. 소년은 좀 이상해 보인다. 네, 얘는 좀 이상해요. 소녀가 말한다. 이렇게 얼굴이 말랑말랑하잖아요, 이런 걸 본 적이 있어요? 소녀는 집게손가락으로 소년의 얼굴을 꾹꾹 누른다. 소년의 얼굴이 부드러운 고무인형처럼 눌려 들어간다. 소년이 웃는다. 병든 원숭이 같은 얼굴이라고 오는 생각한다. 짓무른 눈은 동공을 분간하기 힘들고 작은 콧구멍은 톱밥 같은 물질로 꽉 막혀 있다. 오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 눈을 돌리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소년의 얼굴을 향해 시선이 빨려든다. 끝내 그 얼굴 속으로 들어간다. 소년의 얼굴 속에서 오는 눈언저리의 살을 찌르는 뾰족한 손가락을 느끼고 비명을 지른다. 세면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행운목 잎이 버석거린다. 오는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당신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 〈끝〉

🏆 당선소감

“끝이 아닌 새 도약의 출발선”

황정은·76년 서울 출생·인천대 불문과 중퇴·회사원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본다. 푸른 눈 위에 웅크리고 앉은 북극여우의 몸에서 더운 김이 피어오른다. 내가 쓰는 글은 모두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무겁다.

전철을 타면 이상한 간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어깨나 엉덩이를 움찔움찔 움직여 이상하고 웃긴 춤을 추고 싶었다. 공유는 있되 소통은 없는 그 적막한 공간에 서로의 눈이 멋쩍게나마 마주치는 순간 하나 만들고 싶었다. 소설을 통하여 내가 너를 새삼 돌아보고 네가 나를 새삼 돌아보는 그런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 소박(하고도 거창)한 목적은 이제 없다. 내 마음 속으로 몰래 끌어들인 사람들을 매순간 조금씩 옮겨 적을 뿐이다. 원고를 마주하고 있을 때의 집중은 매번 사람을 향한 집중으로 발전한다. 나는 그 체험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꼭 기억하고 싶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 나의 가난한 부모님, 유경, 세나, 항상 믿어주는 숙경, 태숙, 윤숙, 오래 전 몇 번이나 학비를 대납해주신 김희영 선생님, 소식을 듣고 ‘따끈’하게 축하해준 겨자나 와사비나 식구들, 기회를 주신 경향신문사와 작은 가능성을 보고 길을 터주신 이순원, 김영현 선생님, 박범신 선생님과 이남호 선생님께도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말이 천금 같다. 당선 통지를 받고 믿어지지 않아 내가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던 곳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던 경향신문사 문화부였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 아직도 멀리 떨어진 곳의 일 같다. 나보다 훨씬 깊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이번엔 내가 운을 조금 더 지녔나보다. 부끄러운 작품으로 첫발을 딛게 되었다. 끝이 아니라 두려운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이 짧고 난감한 소감문을 마친다.

📑🪶 심사평

경고 담은 희망메시지 눈길

[심사위원|박범신·이남호]

품들이 대체로 어둡다. 특히 본심에 오른 9편의 작품 가운데서, 3편에서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떠났으며, 2편에서 남편이나 아내는 버림을 받고 홈리스가 되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순수하고 젊은 감수성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게 된 우리 사회의 황폐와 위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춘문예에서 희망이 아니라 경고를 듣게 되었다는 것은, 그러나 그 자체가 조그만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중독’과 ‘나비’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으나 주제의 호소력이 떨어진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진짜 사람보다 더 신중하게 배려하고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곳엔 소년이 있었다’와 ‘상행선’은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작품이다. 그러나 ‘그곳엔…’은 주인공의 이야기와 직업소개소의 이야기가 겉돈다는 느낌이 든다. 또 불행한 과거와 현재의 연애가 잘 연결되지 않고 있다. 세련된 면을 보여주지만 억지스럽다. ‘상행선’은 고속도로 휴게소 여직원들의 세계를 매우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한 세계를 그처럼 언어로 그려낼 수 있음은 작가로서의 소질이 충분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결말이 너무 당혹스럽고, 서사가 약하다. 만약 순진한 주인공이 영악해져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었다면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마더’ 역시 서사가 좀 약하다. 또 자살 사이트라는 소재도 진부하다. 그러나 중심인물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문장력은 수준급이다. 한 인간이 처한 상황과 내면의 고통을 그만큼 냉정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작가라는 뜻이다. 당선을 축하한다.

2005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마더」 황정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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